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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까지도 나에게 허락 하신 최상의 것

고통까지도 나에게 허락 하신 최상의 것

고통의 벼랑 끝에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떨어져 죽을 것 같았는데 주님께서는 한 발을 내딛게 하시더니 날개를 달아 주셨다.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였다. 도무지 풀 수 없는 산 같은 문제들이 나를 짓눌러 숨이 막힐 것만 같았는데 하늘을 날고 보니 구경 거리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다 보이게 된 것이다. 16년의 목회 생활과 결혼 생활이 그렇게 힘들었는데 주님이 주신 날개를 달고 보니 살만한 세상으로 보람 있는 목회 현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0년 동안 앉은뱅이로 고생 하시던 할머니께서 예수님을 영접 하고 고침 받는 체험 적인 신앙의 가정이었다. 10년 만에 앉은뱅이가 일어 났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퍼지자 할머니 집에는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도 바울의 앞치마에만 손을 얹어도 병이 나았던 것처럼 할머니 집 마당만 밟아도 병이 낫는 기적들이 일어 났다. 할머니를 통하여 온 친척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문이 되었다.

이런 체험적인 신앙의 가정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늘 기도와 찬송소리를 들으며 자라 왔던 나는 어려서부터 부흥집회 다니는 것을 참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 된다. 나의 작은 아버지께서 목회 하시던 교회는 내가 사는 곳에서 5km 떨어진 신평 교회였다. 그때는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여 목사님이 된 분 보다는 은혜 받고 성령 충만 하여 성령의 인도 함으로 부흥회를 인도 하는 전도 부인들이 계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동네 이이들을 모아서 함께 부흥회를 다니는 것이 재미 있었다.

밤이면 으스름한 야산을 넘고 냇물을 건널 때면 무서워진다. 그때마다 “캄캄한 밤중에 혼자 걸어도 주께 기도 드리면 무섭지 않네. 주께 기도 드리면 무섭지 않네” 주일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목청 껏 친구들과 함께 부르다 보면 무서움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기쁨으로 야산을 넘곤 했었다.

그때 그분의 성함은 기억 나지 않지만 까만 치마 흰 저고리를 입고 열정적으로 찬송을 부르며 말씀을 전하는 부흥사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 가 없었다.

“나도 커서 저렇게 말씀을 전하는 부흥사가 되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 했다. 신학을 공부 하고 전도사로 부임 받아 사역을 하면서 어느 날 나를 향한 물음이 생겼다. “내가 왜 이 사역을 하게 되었을까?” 성령님께서는 어린 시절을 명확하게 떠오르게 하셨다. 너무도 생생하게 그때 의 모습을…. 하나님은 이미 나의 나 된 모습을 아시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 마음에 소원을 두고 그 일을 행 하셨나 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에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어릴 때 무심코 독백 했던 다짐을 하나님께서는 기억 하시고 지금은 곳곳을 다니며 나의 고통이 주님의 크신 축복이었음을 간증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첫 목회사역)

1981년 2월 나의 첫 목회지는 전남 목포 서부 교회이다. 내 나이 23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전도사였다. 부임 첫날 작은 아버지(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교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잠잠 할 것. 늘 담임 목사님을 돕는 자 임을 잊지 말 것. 어떤 상황이 와도 기도로 마칠 것.

부임 심방을 하면서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목사님을 좋아하는 교인과 장로님 편에서 목사님을 힘들게 하는 교인들이 갈라져서 문제가 있는 교회였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연단 하고 훈련 시키시려고 처음부터 힘에 겨운 교회로 보내셨나 보다.

잠잠 하자! 교인들이 무슨 말을 하던지 “기도 합시다!” 라고 얘기 하자. 다짐 하고 또 다짐 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였다. 심방, 행정, 새 신자 관리, 구역 인도, 청년회, 학생회, 등등… 하나님께서는 나를 강하게 훈련 시키셨다.

교회의 여러 가지 불평 하는 얘기를 들어도 입을 꼭 다물고 오직 “기도 합시다” 로만 대답 했다. 그때부터 교인들은 나에게 불평 하기 시작 했다. 교인들의 마음을 위로 하고 달래 주지 아니하고 벙어리처럼 있다고 여기 저기서 불평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도 변명 하지 아니 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몇 개월이 지난 후, 교인들은 스스로 나를 인정 하기 시작 했다.

우리 전도사님에게 얘기 하면 어떠한 상황이 와도 말 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 두고 기도만 하신다는 소문이 나오면서 불평으로 기득 차 있던 교인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 했다.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시다. 입만 꼭 다물고 있어도 높여 주시고 세워 주시며 아픈 상처들을 치료 해 주셨다. 그런 마음으로 즐겁게 5년 동안 전도사 시절을 보냈다. 서부교회, 둔전교회. 무안읍 제일교회. 모두 훌륭한 목사님 밑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신나는 목회를 하게 되었다. 나는 부족 하였으나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인정 하시고 나에게 직분을 맡기심에 대하여 감사 할 뿐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2)”

(나의 결혼 생활)

고 김현삼 목사님(죽동교회)과 조원태 목사님(무안읍제일교회)소개로 송남용 전도사를 소개 받았다. 그러나 직접 선을 보지 않았다.

1985년 5월 전남 노회 목회자 세미나가 광주 무등산 헬몬 수양관에서 열렸다. 그때 송남용 전도사를 처음 보았다. 명찰을 보고 “저 사람을 소개 해 줄려고 했던 사람이구나!” 하고 서로 인사를 했다. 그 후 편안한 상대로 대화를 하며 만나는 시간이 많아 졌다.

어느 날 주일 저녁 예배 후 송 전도사님과 무안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교인이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 내용이었다. 부랴 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성도는 심한 다리 골절 부상으로 중 환자가 되어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옮긴 다음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 3시간이 흐른 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가 보았더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전 후 사정을 얘기 했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교회에 무슨 일이 있어서 늦을 거라고 생각 하고 막차 시간 까지 기다리려고 했었단다. 곱게 싼 선물을 전해 주고는 5분 밖에 남지 않는 막 차를 타기 위하여 쏜살같이 뛰어 가는 뒷모습을 바라 보며 그의 인내심에 큰 감동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 하게 다가 오는 그이였지만 결혼은 내 임의로 정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라고 기도 하던 중 꿈으로 말씀 해 주셨다. 꿈속에서 선명하게 송 전도사님의 어머님을 보여 주시며 함께 손을 잡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나를 꼭 안아 주셨다. 꿈을 깬 후 한번도 뵙지 못한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꿈속에서의 모습과 똑 같으면 한식구가 되라고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드리겠다고 소원을 하고 전도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함께 가서 어머니를 뵙자고 한다. 어머니를 뵙는 순간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본 모습 그대로 목소리까지 너무도 정확 하였다.

하나님께서 허락 하신 결혼이라 생각 하고 1985년 12월 16일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하고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결혼 생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때부터 목회현장에서의 고통이 시작 되었다. 결혼 후 첫 사역 지는 “해남읍 미암 교회” 였다.

처음으로 시작 하는 담임 목회는 교인들과 씨름 하는 하루 하루였다.

그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남편의 목회 사역(설교, 심방, 행정)이었다. 성공적으로 목회 하시던 40-50대의 목사님 밑에서 보고 배워 온 나는 20대 후반 철부지 전도사를 그 목사님들의 수준 까지 끌어 올리려고 하니 남편도 힘들어 하고 나도 힘들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 이었다. 교회 일만 얘기 하면 서로 싸움이 된다. 행복 해야 할 가정이 교회일로 지옥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 절 바보로 만들어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요 귀도 없고 , 눈도 없고, 입도 없어 판단 하지 못하도록 바보가 되게 해 주세요”

이것이 매주 나의 기도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 훨씬 내 마음이 편안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 하면 한없이 어리석었다. 남편의 약한 부분들을 기도로 돕는 자가 되라고 가정을 주셨는데 지혜롭지 못한 나는 내가 판단 하고 정죄 하면서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주었으니 하나님도 나를 바라 보시고 참 많이 괴로우셨을 것이다.

“내 눈 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티를 빼려 하느냐?” 고 주님은 내게 책망 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자꾸 내 속에서의 전쟁은 커져만 갔다. 남편 역시 힘들게 하는 나를 바라 보며 만약 하나님이 다시 결혼 하게 하신다면 “신학” “신” 자도 모르는 여자와 하겠다고 다짐 하고 다짐 하면서 서로가 마음의 고통을 넓혀 가고 있었다.

신혼의 달콤함은 찾아 볼 수도 없이 고통의 연속 이었다. 그런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알아 가게 하시며 광주 칠석교회를 거쳐 군목으로 가게 하셨다. 3년의 군목 생활을 마치고 성남 둔전제이 교회 담임목사로 사역 할 때이다. 더 이상 버티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때 선배 목사님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산리 기도원에서 사모 세미나가 있으니 함께 참석 하자는 연락이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으로 보따리를 싸 들고 오산리 기도원으로 갔다.

1992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성함은 알 수 없지만 세미나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다 큰 충격을 받았다. 목사님들은 교인들의 말보다는 사모의 말 한마디에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설교 후 강단에서 내려 오면 온 힘이 다 빠지는데 그 상황에서 “오늘 당신 설교가 왜 그래요?” 라는 말 한마디에 3개월 동안 밥 숟가락들 힘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잘못 했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 동안 얼마니 많이 남편을 정죄하고 힘들게 했는가를 깨닫게 하시며 회개 하기 시작 했다. 남편을 세워 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기를 꺾고 살아온 나의 어리석음을 보게 하셨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남편을 향한 나의 기도가 바뀌기 시작 했다. “하나님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주시고 바울과 같은 열정을 주시며 베드로와 같은 말씀의 능력을 주세요” 교과서 같은 기도를 매일 드리며 열심히 노력 해 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깎고 다듬어 가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보다는 내 생각이 앞선 삶의 연속이었다.

(캐나다에서의 나의 생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원대하신 계획 속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를 캐나다로 보내셨다. 오로지 공부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가방 6개와 8살인 딸과 1살인 아들을 데리고 밴쿠버에 1995년 1월 17일에 도착 하여 광야 학교 훈련이 시작 되었다.

남편(목사님)은 공부 하고 나는 생활을 책임져야 하기에 한국에서 두 달 미용 기술을 배워 왔다. 그 기술로 미용실에 취직이 되어 미용사를 돕는 일을 하다 두 달 만에 하나님께서 준비 하신 장소에 이라크 사람과 함께 미용실을 열게 되었다. 기술도 없이 어떻게 미용실을 열었는지 지금 생각 하면 그 용기가 대단하다.

처음 미장원에 온 파마 손님 머리를 3시간이나 말았는데(캐나다 미용법은 물을 머리에 바른 다음 파마를 말고 맨 나중에 약을 바름) 미용사 꼼꼼 하게 머리를 잘 만진다는 소문으로 그 다음에는 자기 딸을 데리고 와서 머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하나님은 눈과 생각을 바꾸시는 분임을 경험 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장원을 운영한지 6개월 만에 많은 손님들을 보내 주셔서 예약 하지 않고는 미장원에 올 수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아졌다. 나는 프로 미용사가 되었고 단골 손님도 많아졌다. 바쁘다 보니 내 육신이 피곤 하여 기도 할 시간도 말씀 묵상 할 시간도 없이 내 영성은 바닥으로 내려 가고 있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8:6)”

영의 생각 보다는 육신의 생각을 먼저 쫓아 가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불안 해 하기 시작 했다. “여보! 미장원 그만 두고 기도 하는 당신의 모습으로 돌아 오면 좋겠어요” 라고 권면 하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내가 미용실을 그만 두면 목사님 학비와 우리 생활은 어떻게 책임 져야 하는지, 자꾸 인본주의 생각이 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목사님이 몇 번씩 권면 하였지만 무시 하고 내 생각대로 일을 하며 계속 밀고 나갔다.

그렇게 1년6개월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나 선명한 꿈을 주셨다. 오른쪽으로 가면 10시에 추도 예배가 약속 되어 있고 왼쪽으로 가면 10시에 미장원 커트 손님이 약속 되어 있었다. 그 삼거리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예배 장소로 가면 예배가 끝나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 해서 미장원이 있는 왼쪽으로 돌아 길을 가려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큰 구렁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삼키려는 듯이 달려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 잘못 했어요 예배 드리러 갈게요 하나님! 용서 해 주세요” 내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났다.

목사님께 꿈 얘기를 했더니 “당신 미장원 그만 두고 당신의 모습으로 돌아 오지 않으면 정말 구렁이 한 테 무릴 거예요” 라고 말 한다. 그러나 난 그 꿈을 영적으로 민 감 하게 깨닫지 못했다. 미장원이 잘 되니까 사탄이 못 하게 하려고 방해 하는 것이라고 나의 어리석음과 고집으로 계속 일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주신 후, 일년이라는 기간을 기다려 주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내 방법대로 살아 오는 나에게 깨닫게 하려고 나의 환도뼈를 치셨다. 왼쪽 환도가 아파 오면서 도무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만드셨다. 병원에 가보니 연골이 다 없어져서 뼈의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에 일을 계속 하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천 천 벽력 같은 진단이 나왔다. 몸이 아프니 그때야 남편의 말이 마음에 새겨졌다.

기도 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쳤던 것을 내려 놓기 시작 했다. 미장원 문을 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 시작 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 할 테니 건강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50%밖에 형성 되지 않는 다는 연골을 형성되게 하셔서 두 달 만에 깨끗이 치료 해 주셨다.

건강해지니 다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에서 고기가 생각나 애굽을 그리워 했던 것처럼 경제적으로 힘들어 지니까 ‘미장원에서 일을 하면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를 과거로 돌아 가게 하였다.

그래서 목사님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다시 미용을 하게 되었다. 집 베란다에 미용실을 꾸미고 단골 손님들이 찾아 오면 일을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께서는 8개월 동안 참아 주시다가 다시 꿈으로 말씀해 주셨다.

내가 어린 시절에 자란 마을 뒷산에 기도원이 있었다. 정상적인 길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 먼 길로 돌아 가야만 했다. 그러나 빠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동네 앞 논두렁을 지나 야산을 넘으면 조금 빨리 갈 수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또 고민 하기 시작 했다. 정상적인 길은 너무 멀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빠른 길로 가야겠다고 결정 하고 동네 앞 논두렁을 지나 가는데 어딘선가 회오리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파랗게 자란 보리 밭 위로 구렁이 두 마리가 나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보리 밭을 지나 가는 소리가 내 귀에는 회오리 바람 소리로 들린 것이다.

“하나님! 잘못 했어요 정상적인 길로 갈게요 도와 주세요” 소리치며 큰 신작로 길로 되돌아 나오는데 그 논두렁 길에 조그마한 실 뱀들이 늘어져 있었다. 밟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큰길로 나온 후 꿈에서 깨어 났다.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기분이 좋지 않는 꿈 얘기를 목사님에게 했더니 “당신 정말 기도 생활 하지 않고 미장원을 계속 하면 이제는 구렁이 두 마리한테 물린다” 라고 얘기 한다.

그러나, 그 말이 내 마음속에 새겨지지 않고 또 사람의 생각으로 자꾸 물질적인 계산이 되며 내가 미장원을 하지 않으면 생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 속에서 그 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고 그냥 넘겼다. 그 꿈을 꾸고 5일 만에 나는 사고를 당 했다.

그때는 목사님이 공부를 마치고 개척교회를 시작 할 때였다.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을 위하여 매 주일 이면 나는 교인들의 밥을 해 주었다. 캐나다에는 고사리가 참 많다. 고사리를 꺾어 말려 두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밥 하기도 쉬우니 꺾으러 가자는 제의를 해 왔다. 목사님에게 허락을 구했더니 불법으로 고사리를 꺾는 것은 덕이 되지 않으므로 가는 것을 제지 시켰다. 캐나다에서는 고사리를 꺾는 것이 불법이며 조사단원들에게 걸리면 500불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 하지 못하고 고사리를 꺾으러 간 것이다.

처음으로 갔지만 산에 널려 있는 고사리를 보니 신이 났다. 쓰러져 있는 통나무를 딛고 넘어 가면 많은 고사리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발이 통나무를 딛는 순간 이끼에 미끄러져 통나무를 안고 넘어지고 말았다.

외상은 아무 것도 없는데 숨을 쉴 수가 없다. 속에서 뭔가 쏟아 지는 느낌이 오면서 고통 때문에 감당 할 수가 없다. 더 이상 고사리를 꺾을 수 없어 집으로 오려는데 운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파 온다. 구급 차를 불러 응급실로 갔는데 엑스레이를 찍으니 갈비뼈가 부려졌단다. 갈비뼈만 부러진 줄 알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숨 못 쉬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경험 하게 하셨다.

그 고통 속에서 삼 일을 지낸 후, 가정의를 찾아 갔더니 깜짝 놀랜다. 빨리 전문의를 찾아 가라고 소개를 해 준다. 전문의는 나를 바로 응급실에 입원을 시켰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려 폐의 공기가 다 빠지고 피 고름들이 내 기도를 막히고 있어 살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있는 게 기적 이라며 오히려 의사들이 놀랐다.

호수를 끼어 6800cc 의 피 고름을 빼내어 기적적으로 살아 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주시려고 작정을 하셨는지 호수가 구부러져서 숨쉴 때 마다 폐의 신경을 건드려 쉬지 않는 고통 속에서 견딜 수 없게 하셨다.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의사는 나에게 천 명에 한 사람 정도는 전신 불구자가 될 수 있는 위험한 마취 주사(진통제)를 놓게 되었다. 진통제를 놓는 순간 육신의 고통에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 지는 것 같았다.

진통제로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이 되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때부터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원망은 겉 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내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다.

“하나님! 내가 뭘 잘못 했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당신만을 위하여 살아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주일을 한번도 범 한적이 없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간 적도 없고 오직 주의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내 의를 내세우며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은 깨닫지 못하는 나를 향하여 이제는 눈만 감으면 가위에 눌리게 하셨다. 새까만 꼬마 병정들 수 백 명이 아픈 곳에서 그네를 타며 나를 괴롭게 했다. 신음 하며 눈을 떠 보니 꿈 이었다. 또 내가 생선을 먹었는데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그 가시가 커지면서 숨도 쉴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이 나를 힘들게 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또 꿈이었다. 그 후부터는 무서워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목사님이 설교 테이프, 찬송가 테이프를 갖다 주며 들으라고 하였지만 하나님께 화가 나서 듣기도 싫고 성경책 보기도 싫었다. 그러나 계속된 꿈으로 고통에서 시달리던 나는 그제서야 옆에 있는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 잘못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께서 지켜 주시지 아니 하면 잠 한숨도 잘 수가 없어요. 도와 주세요” 라고 기도 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입술로는 용서를 빌며 눈에서는 눈물만 흘렸다.

3시간쯤 울고 났을까?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있던 내 마음은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이 찾아 왔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물음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통을 주실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이유에 대하여 알고 싶어졌다.

“하나님 가르쳐 주세요 나에게 이 고통을 주신 분명한 이유에 대하여 말씀으로 보내 주세요” 라고 간절하게 기도 하며 그때부터 병상에서 말씀을 읽기 시작 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온갖 환난을 당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우리를 위로 하셔서 온갖 환난 당 한자들을 위로 하게 하십니다(고후1:4)” 새 번역 성경

이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불덩이처럼 새겨지며 다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내 고통을 위로 하신 후에 이제는 다른 고통 당한 자들을 위로 하게 하시려고 나에게 이 고통을 주신 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천 마디 만 마디가 나를 위로 해 줄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이 레마로 내 마음에 새겨지면 나를 살려 내는 역사가 이루어짐을 경험 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곤란 중에 나의 위로라 이 말씀이 나를 살리 셨도다(시119:50)

고통까지도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 하신 최상의 것임을 고백 하며 그 은혜가 너무 감사 하여 감격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세가지 환상을 주시며 깨닫게 하셨다.

16년간의 목회 여정 속에서 병든 자들을 돌아 보는 내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렇게 가증 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위로 하기 보다는 입술로 위로 하는 내 모습을 바라 보며 통회 하게 하셨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보게 하셨다. 그 고통을 바라 보며 우리 모두의 위로 자가 주님이심을 머리로만 알았던 내게 가슴으로 느끼게 하셨다. 남을 위로 한다는 것은 내가 당한 만큼 위로자가 될 수 있다. 내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우리 주님의 고통과 비교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보여 주셨다. 이 부활이 있었기에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깨닫게 하셨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난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기 보다는 성경에 기록 된 예수님을 전했다. 비로서 병상에서 만나 주신 주님을 통하여 내가 만난 예수님을 고백 하게 되었다. 그런 은혜 속에서 육신적으로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계속 되었지만 내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21일간의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 했다. 그러나 폐가 아무는 고통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숨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또한 큰 바위를 등에 지고 있는 것 같은 고통 때문에 반드시 누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은혜가 있었기에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있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회복 기간은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은혜 속에서 힘은 들었지만 잘 감당 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목사님에게 문제가 일어 났다. 6개월 동안 나를 간호 하며 아이들을 돌보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보다는 개척 교회가 성장 하지 않아 교회를 섬기는 고통이 목사님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한 것이다.

육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부흥 하지 않는 교회를 바라 보며 자신의 한계점을 느끼고 영적 침체로 빠져 든 것이다. 자신의 무능함을 탓 하며 열등의식 속에서 사람 만나기도 꺼리고 골방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날로 많아졌다. 한국으로 돌아 가 목회 하기를 소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목회 길도 막아 놓으시고 부르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한국에 가서 개척이라도 하면 이곳 보다는 더 나을 수 있으니 가자고 권면 하지만 난 이곳에서 성공 하지 못하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니 갈 수 없다고 목사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목사님의 생각에 동의 하지 않았다.

함께 생활 하는 가족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주니 혼자인 것 같은 고독함이 그를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았다. 화이트락 바닷가에서 비를 맞으며 수없이 죽기를 원했지만 죽을 수 도 없었다. 하루는 정말 죽음을 각오 하고 바닷가 나무 다리 옆에 서서 “하나님 죽기를 원합니다. 이대로 데려가 주세요” 라고 외치는데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종아! 이왕 죽으려면 기도 하다 죽어라!”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 기도 하다 죽겠습니다. 기도 하다 먹을 것이 없으면 순교 하는 것이요. 기도 하다 죽으면 순종의 면류관은 받을 수 있겠지요” 그때부터 목사님은 부르짖어 기도 하기 시작 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 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아침, 저녁으로 성전에 나가 울면서 부르짖기 시작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캐나다 교회에서는 울면서 부르짖는 기도를 이해 하지 못했다. 밤낮으로 교회에 들어와 울면서 부르짖는 기도 소리를 듣고 우리가 빌린 시간만 들어와서 기도 하도록 경고를 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교회를 빌려서 주일날만 예배 드리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마음껏 기도 하고 싶어도 기도 할 수 없는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 하게 하셨다. 또한 한국에서 내 교회 건물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 할 수 있는 장소를 주셨는데도 기도 하지 않았던 죄를 통 회 하게 하셨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떼를 쓰는 기도를 시작 했다.

“하나님! 골방 이라도 좋으니 마음껏 부르짖어 기도 할 수 있는 처소를 주세요” 라고 기도 하기 시작 했다. 하루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 온후, 간식을 만들기 위해 부엌에 있는데 목사님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오더니 내 손을 잡고 서재로 들어 가신다. 따라 들어 갔더니 책상 앞에 있는 큰 창문에 주님이 서 계신다며 나에게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혼란 하게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면 저에게도 보여 주세요. 변화산에서 변영된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던 것처럼 저에게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 했지만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목사님은 주님이 떠나셨다고 말한다.

병상에서 주님이 나에게 찾아 오셨음을 체험 했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자 나는 또 실망 하며 하나님께 기도 하기 시작했다. “병상에서 만나 주셨던 주님! 왜 저에게는 만나 주시지 않으셨나요? 이제는 절 사랑 하지 않으시나요? 라고 하며 기도 했다. 그때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시어 “질서의 하나님” 이란 깨달음을 주셨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결혼 하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의 여정을 말씀 속에서 돌아 보게 하시며 남편에게 순종 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통회 하게 하셨다. 늘 남편 보다 앞서가려는 내 생각을 완전히 내려 놓게 하셨다. 남편의 말에 순종 하지 못하여 당한 고통들을 깨닫게 하시며 남편에게 온전히 순종 하길 원 하셨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남편의 말에 복종 하기를 주께 하듯 하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또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목사님은 그때부터 눈물의 선지자 엘리야처럼 눈물의 종이 되었다. 나무를 보아도 꽃을 보아도 감사 하여 눈물을 흘린다. 길을 걷다가도 하늘을 쳐다보며 감격 하여 우신다. “그 동안 잘 참아 주어서 고맙다” 며 나를 껴안고 우신다. 우리 아이들을 향하여 “너희들을 더 사랑으로 안아 주지 못하여 아빠가 미안 하다” 며 눈물 흘리신다.

아이들은 아빠를 향하여 “아빠 인상 쓰지 마세요” 라는 말을 자주 했다. 큰 아이는 “아빠 이마의 인상을 다리미로 다려서 폈으면 좋겠어요” 라고 나에게 종종 말했다. 늘 세상 근심 혼자 다 지고 있는 사람처럼 고통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깊은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변하신 것이다. 환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이 감사로 변한 것이다.

기도가 깊어지면 감사가 깊어지고 감사가 깊어지면 내 마음이 넓어져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들을 다 수용 할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변한 것이다. 상대방의 단점이 내 마음에 들어와 이해가 되고 상대방의 장점은 내 안에서 꽃이 피어난다. 이런 은혜 속에서 우리 가족은 결혼 후 처음으로 가정의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되었다.

목사님과 나는 심방 오라는 교인도 없고 심방 갈 성도의 집도 없어 성경을통독 하기 시작 했다. 그 동안 목회 하면서 열심히 말씀을 보지 못 했음을 회개 하면서 열심히 성경을 읽어 갔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 놓고 우리는 그 시간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다. 하루 7-8시간 말씀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우리를 말씀으로 준비 시키셨다. 또한 매일 큐티 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그날 주신 말씀을 온 종일 묵상 하며 마음에 새겼다.

지금 기도원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많은 말씀을 외울 수있느냐고 묻는다. 상담과 중보 기도 중에 말씀을 생각 나게 하셔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며 응답 하시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가까이 했더니 이러한 능력이 나타남을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 나게 하시리라(요14:26)”

이런 은혜 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지내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에 목사님께 “갈멜산에 임 하였던 성령의 불이 그곳에 임 재 할 것이다. 밴쿠버, 북미주, 세계를 향하여 기도의 도성이 되게 할 것이다” 라고 말씀 하시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택에서부터 기도원을 시작 하라고 명령 하셨다.

어느 날 나에게 성령께서 주신 감동들을 얘기 하며 집에서부터 갈멜산 기도원을 시작 할 것을 제의 해 왔다. 그러나 나는 준비 되지 않았다. 내가 생각 하는 기도원 목사님은 우리와 조금은 다른 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기도원은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없다고 말씀 드리고 기도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 전 기도원 사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의 훈련도 되지 않았고 기도원 사역은 안 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계획을 묻기 보다는 나의 일방적인 기도를 드리기 시작 했다. 이 주일이 지난 후 꿈으로 저에게 보여 주셨다. “큰 체육관 같은 곳에 많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았고 강단에서는 남편이 설교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직감적으로 기도원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또 기도 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 보여 주셔도 난 못 합니다 기도원 목사님은 성격도 과격 하고 남 다른 카리스마도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다시피 내 남편은 성격도 온순 하고 차분 한데 어떻게 기도원 원장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 만은 피해 가게 해 주세요” 라고 남편의 성품까지 고하며 할 수 없다고 때를 썼다. 모든 것 순종 하겠다고 약속 했으면서도 기도원 사역만은 순종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꿈을 주셨다. 첫 번째 꿈과 똑 같은 장소에 더 많은 사람이 앉아 있고 삼면 벽에는 두 줄로 사람이 서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때 한 청년이 봉투를 가지고 강대상으로 올라와 목사님에게 기도해 주시라고 부탁 하는 것이다.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한테 부탁 하지 나한테 왔냐고 하면서 기도 해 주는 모습을 보고 꿈에서 깨어 났다. 초교 파 적으로 모여 있는 교인들을 보게 하면서 기도원 사역임을 확실하게 알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기도원 사역만큼은 할 수 없다고 때를 썼다. 기도원 사역은 신유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등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사역이지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나를 묶고 있었다. 그 때 성령님께서 물으신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느냐?” 생각 해 보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못 한다고 그러느냐? 너는 순종 하고 따라만 와라. 내가 모든 일은 시행 하겠다” 강하게 내 마음속에 깨달음을 주셨다. “하나님 잘 못 했습니다 주께서 하라는 대로 순종 하며 따르겠습니다” 라고 고백 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내가 남편에게 순종 하기를 원 하셨다. 절대 순종 하겠다고 다짐 했으면서도 또 순종 하지 못한 내 모습을 회개 하게 하시며 말씀으로 나의 성품을 다듬어 가셨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 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전폭을 남편에게 복종 하게 하셨다. 말씀은 능력이다. 자꾸 넘어지는 나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또 다시 순종 하게 하셨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 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 도다(시107:19-20)”

순종 하고 나니 내가 행복 해 졌다. 남편에게 순종 하라는 것은 나에게 남편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행복 주시려고 순종 하게 하셨음을 살아 가면서 더욱 느끼게 하시니 순종 또한 하나님의 큰 은혜임에 감사 할 뿐이다.

그리하여 목사님에게 말씀 하셨던 갈멜산 기도원이 사택 거실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우리가 살던 사택을 교회 밖으로 이사를 하고 그 자리를 기도원으로 꾸몄다. 거실을 성전으로 만들고 방들은 숙소로 만들었다. 목사님은 기도 하는 것이 좋아 새벽 기도 시간부터 밤 늦도록 집으로 돌아 오시지 않고 성전 에 계셨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목사님 도시락을 싸가지고 기도원을 가면 그때까지 강대상 밑에서 기도 하신다.

난 그때 까지도 기도의 훈련이 되지 않았다. 한 시간 이상 기도 한다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목사님을 따라 성전 바닥에 앉아 목사님이 우시면 그냥 따라 울고 찬송 하면 따라 부르고 부르짖어 기도 하면 따라 기도 하다 보니 하늘의 크고 비밀한 일들을 경험 하게 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 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기도는 훈련이다.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나를 쳐 복종 시키는 끈질긴훈련 속에서 기도의 능력을 받을 수 있음을 경험 하게 하셨다. 기도의 맛을 알고 나니 기도 하는 것이 좋아 기도 하게 되며 기도 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되니 살 맛 나는 세상으로 바꿔 진 것이다.

우리 큰 딸은 대학 4학년이며 작은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이다. 8살과 1살 때 캐나다에 왔지만 공부도 잘 하며 둘 다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아는 모든 분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기도 하고 하나님은 저들을 키워 주십니다.”

나는 자녀들을 위하여 일 천 번제 기도를 세 번 끝내고 4번째(사천 번제) 드리고 있다. 매일 성경을 읽어주고 말을 할 때는 따라 읽게 하고 성경을 쓰게 하여 말씀으로 한글도 깨우쳤다. 어려서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실천 했더니 아이들이 습관이 되어 스스로 하지 않으면 못 견딘다.

4년 전 작은 아들 여름 방학 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캐나다의 초등학교 방학은 두 달이 넘는다. 여름방학이 되면 늘 고민이 생긴다. 어딘가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와이 캠프. 스포츠 캠프. 하키캠프. 골프캠프 등등... 그러나 경비며 라이드 문제가 여의치 않아 작년 여름에도 아무데도 보내지 못하고 그냥 기도원 일을 도우며 지내왔다.

올해도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그냥 지내고 있는데 아보스포드 지역 축구 캠프가 있다며 선권이(아들이름) 보내지 않겠냐고 최 사모님의 연락을 받았다.

며칠 전부터 우리아이는 축구하고 싶다고 나에게 몇 번 이야기 했지만 여의치 않아 무시하곤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의 심정을 헤아리셨나 보다.

축구화까지 준비해 놓으시고 라이드 하기 힘드니(우리 집에서 30분거리)

사모님 댁에서 지내며 사모님 아이들과 함께 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너무 감사하고 감격이 된다.

남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사모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고맙다고 연신 감사인사를 드리며 염치 불구하고 삼박 사일 신세를 지기로 했다.

엄마아빠를 떠나 남의 집에서 삼일 밤을 지내는 것은 처음인데 우리 아이는 신이 나서 배낭에 칫솔. 옷가지. 양말. 성경책. 등등 잘도 챙긴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한번도 보내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온다.

스스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사모님 댁으로 떠난 후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사모님의 전화가 왔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선권이 칭찬을 참 많이도 하신다. 정리 정돈 잘 하며 꼭 성경 읽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기특하고 사모님 아이들의 모델이 된다며 한달 쯤 함께 지내고 싶어 하신다.

한 살 때부터 성경을 읽어주고 따라 읽게 하면서 우리아이는 한글을 깨우쳤다. 그때부터 자기 전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여행 갈 때나 친구 집 생일파티 슬립오버(친구 집에서 자는 것) 할 때도 장난감은 챙기지 않아도 성경책은 꼭 챙기는 것을 보면 늘 대견하고 기특했는데 목사님 사모님도 그렇게 보셨나 보다.

어릴 때 의 습관이 모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어 참 기쁘다. 삼박 사 일의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그곳 생활이 즐겁고 좋은 시간이었다고 겪은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축구캠프에 발렌티어로 일하던 형(고등학생)이 선권이에게 칭찬을 많이 했단다.

"너 축구 배웠니?"

"아뇨, 배우지 않았어요"

"그런데 축구를 참 잘하는구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 했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찌 저 어린 아이의 입에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지...

"너 어떻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니?" 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그러셨잖아요 누군가 칭찬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하라고요" 그랬다. 얼마 전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너무 예뻐서

"우리아들 참 잘생겼네!!" 했더니

"뭘요, 아니 예요" 라고 대답하길래

“아들아,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하면 널 만드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라고 일러주었는데 우리아들은 그 말을 깊이 가슴에 품고 있었다. 축구캠프에서 칭찬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

큰 딸 역시 우리의 기쁨이다. 어느 날 딸 아이가 우리를 부르더니

“엄마 아빠 눈감아 보세요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두 분이 함께 손 내밀어 보세요” “뭔데 그냥 주면 안돼?” “안돼요 빨리 눈 감아요’

나와 남편은 눈을 감고 손을 내밀었는데 손위에 큰 봉투가 올라옴을 느꼈다.

“꼭 필요 할 때 비상금으로 쓰세요. 제가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 하면서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았어요. 엄마 아빠 드리고 싶어서….”

눈물이 핑 돈다 “안돼! 네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네가 필요 할 때 써야지”

우리 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를 떠나 내일 이면 UBC기숙사에 들어 간다. 그 동안 3시간을 버스 타고 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길거리에서 허비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공부 하는데 시간이 필요 하단다. 그리하여 2년 만에 기숙사에 들어 가게 되었다. 기숙사에 가지고 갈 짐을 꾸리면서 처음 집 떠난 딸 때문에 마음이 아려 오는데 또 이런 감동을 주는 것이다.

딸은 방학 동안 내내 좋아하는 스키 한번 타러 가지 아니 하고 매일 투터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또 일식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수고 하더니 엄마 아빠에게 이런 감동을 준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서 노트북 사야겠다고 다짐 하고 또 다짐 하더니 학교 도서관에서 컴퓨터 쓸 수 있으니 꼭 자신의 컴퓨터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 딸은 종알 종알 말을 잘 한다. 학교 다녀와서 그날 일어 났던 일들을 장황 하게 늘어 놓으며 늘 식탁을 웃음꽃으로 풍성하게 만들어 준 딸이다. 공부 하면서 일어났던 교수님의 얘기 친구들과 재미 있었던 얘기 버스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 속상했던 일 즐거웠던 일 등등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 하며 모든 식구들에게 기쁨을 준다.

하나님도 우리가 매사에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고하며 아뢰일 때 기뻐하시리라.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속상한 일, 괴로운 일, 분한 일, 내 힘으로 감당 할 수 없는 일, 황당한 일, 등등….딸을 보며 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 하게 되었다. 이런 자녀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 할 뿐이다.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아이들을 깨울 때 기도로 깨운다.

누워 있는 아이를 꼭 켜 안고 “하나님 아버지!” 하면 얼른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은 다. 잠들기 전에도 꼭 켜 안고 기도로 재운다. 스무 살이 넘은 딸아이와 나보다 훨씬 커버린 아들이지만 엄마의 기도소리를 듣고 잠드는 것을 평안해 한다.

나는 지금도 자녀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 한다.

“하나님! 우리 딸 우리 아들 세상에서 기도 많이 하는 자녀 되게 해주세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예민 하게 듣고 순종 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주시고 다윗과 같은 담대함을 주시며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주시며 사도바울 과 같은 열심을 주셔서 하나님께 값지게 쓰임 받게 해주세요”

말씀 속에서 기도 하는 자녀가 하나님께 순종 하며 기도 하는 자녀가 부모님께 순종하고 기도 하는 자녀가 십일조 생활 잘 하여 축복 받을 것이며 기도하는 자녀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어두움에 빛을 비쳐 세상을 뒤바뀌는 위대한 사람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줄 믿기 때문 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기도)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또한 기도는 내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 가는 큰 능력임을 경험 하게 하셨다.

우리 아이는 크리스챤 사립학교에 다닌다. 우리 형편으로는 도무지 학비를 지불 하며 학교를 보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기도 중에 자꾸 감동이 왔다. 아이 역시 크리스챤 학교를 다니길 원했고…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어 작정 기도에 들어 갔다. 나의 가능성 하나님께 드리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기에…. “하나님! 어떡해요 하나님 말씀으로 교육 하는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우리 형편으로 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으니 어 떡 하면 좋아요 주님이 원 하신다면 확실하게 말씀 해 주세요”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다 “그 아들은 내 아들이다. 내가 책임 진다. 걱정 하지 말고 보내라. 말씀 안에서 바르게 성장 하길 나도 원한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화이트락 크리스챤 스쿨 8학년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부모의 신앙 상태와 아이의 학교 성적을 우선 순위로 정 하여 학생을 뽑는다. 부모님의 신앙도 합격, 올A를 맞은 학교 성적도 합격 하여 다니게 되었다.

기도 하는 것과 말씀 보는 것이 습관화 되어 즐거워하므로 신앙이 있는 학교에서 공부 하는 것이 저도 마냥 좋은 모양이다. 학교 다녀와서는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장황 하게 늘어 놓는다. 수업 시작 하기 전 기도 하고 공부를 시작 해서 너무 좋단다. 서로 기도 제목을 내놓고 함께 중보 기도 한단다.

또한 친구의 엄마가 폐암에 걸려 특별 기도를 부탁 했다며 눈물로 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도 하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친구들 얘기며 선생님 이야기 늘 신이 나 있다.

하루는 “엄마! 나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그 친구는 별로 감격 하지도 않고 “고마워”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라고 묻는다. “기분이 안 좋겠네! 감격해 하며 “고마워 정말 고마워”해야지? 했더니

“그렇지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가 감격 하며 감사 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께서도 슬프시겠지요?” 라고 한다. 수학 시간에 수학 선생님이 들려 준 이야기 라고 하면서 감동이 되어 나에게 들려 준다.

우리 아이는 학교 생활에 만족해 하며 늘 감사하여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 아이의 얘기 속에서 우리는 짐작 할 수 있다. “친구들은 공립학교에 돈 내지 않고 다니는데 난 돈을 내고 사립 학교에 다니니 더 열심히 공부 할게요” 가끔은 이런 얘기를 우리에게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 하기도 하고….

우리 아이는 축구를 참 좋아한다. 작년 일년 동안 축구 클럽에 다녔는데 올해에는 랭리 8학년 선수로 뽑혔다. 라이드 하기는 조금 힘들지만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 하고 있다.

일주일에 화, 목요일은 연습하고 매주 토요일에는 시합이 있다. 우리 아이는 시합이 있는 토요일이 되면 너무 좋아한다. 게임 하는 모습을 보며 체력은 약하지만 순발력이 있어서 재빠르게 공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함께 신이나 목청껏 응원도 하면서 토요일을 함께 기다리기도 한다.

이번 시합은 각 시 대표들이 참피언을 뽑는 게임이 시작 되었다.

토요일 두 팀 시합에 모두 이겨 신이 나 있다. 그러나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니 갈수 없다고 코치 한 테 말을 하고 예배를 드렸다. 주일 오후 코치 한데서 전화가 왔다. 오전 시합에도 랭리 팀이 이겨 오후 마지막 결승전이 남아 있으니 꼭 선권(아들 이름)이 가 와서 게임에 동참 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들은 신이 나 시합에 나갈 채비로 축구화를 신고 걸어 가는데 발을 절뚝거린다. 왜? 발이 아프냐고 물었더니 신발이 작아서 발가락이 아프단다. 그럴 법도 하지. 일년 전에 사준 축구화를 지금까지 신었으니 키가 자란 만큼 발도 많이 자랐을 텐데…. 발가락이 아프면서도 엄마 아빠에게 말 하지 못한 아들을 생각 하니 마음이 아려 온다.

이 광경을 기도원에 올라 오신 K집사님이 보았다. 집사님은 축구 장학금이라며 봉투를 내민다. 축구화도 사 신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힘도 많이 기르라고…. 아이는 그걸 받는 순간 두 무릎을 꿇으며 간절히 기도 한다. 기도를 마친 후 “학교 장학금으로 쓸 거예요 발가락 아픈 것은 조금 참으면 돼요”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K집사님은 그 날밤 선권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 하게 되었단다. 기도 중 성령님께서 생각 나게 하셨다.

1990년 집사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소원 한 것이 있었다. 시아버님 고희 잔치 때 많은 사회 인사 친지들을 모셔 놓고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받은 복을 사회에 환원 하는 마음으로 새싹들을 키워내는 장학 재단을 만들어 생활이 어려우나 공부 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선별하여 공부 시키겠다고 서원 했단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지면 시작 하리라 미루다가 I M F 로 혼란 속에서 어려움을 당 하게 되었다 시련 속에서 이민을 오게 되어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기도 중 성령님께서 생각 나게 하신 것이다. 숙제처럼 남아 있던 모든 것들을…

그날 밤 간절히 기도 하는데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다. “지금부터 시작 해라 뭔가 이루어졌을 때가 아니라 지금 시작 하면 이루어 질 것이다. 제1호로 송선권에게 장학금을 지급 하여라” 강한 감동으로 성령님의 말씀에 집사님은 순종 하여 우리 아이에게 장학금을 지불 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대학 갈 때까지 아니, 대학 가서도 이 마음 변치 않도록 기도 해 달라면서 감사 하고 또 감사 하단다. 아이를 통하여 미루었던 큰 숙제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 한지 모른다며 집사님은 오히려 우리 아들을 향해 깨우쳐 준 것 감사 하단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능 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가능성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불가능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 한데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뿐만이 아니라 기도의 위력은 병마도 물리치고 귀신도 쫓아낸다.

몇 일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 양치질을 하면 왼쪽 검지와 장지 손가락에 마비가 온다. 전혀 아프지는 않는데 자주 마비 증세가 생겨 닥터를 찾아 갔더니 정밀 검사를 해 보자고 하여 C.T 촬영을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는데 3번 4번 목뼈 사이에 디스크가 생겼다는 결과가 나왔다. 몇 달 전부터 뒷목이 쉬 피곤 하고 어깨가 아프더니 목 디스크 라니…

닥터를 통해 검사 결과를 듣고 나니 그때부터 난 중환자가 되고 말았다. 목을 가눌 수 가 없다. 밥을 지을 수 도 없고 설거지를 할 수도 없다. 컴퓨터를 열어 목 디스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목뼈는 8개의 뼈로 구성 되어 있으며 목 디스크의 증상은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저리며 뒷 목이 댕기고 머리가 바위를 이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등등….이 모든 증세가 나에게 찾아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목을 보호 하는 기구에 의존 하며 화장실 가기도 힘들어 침대에만 누워 있는 중환자가 된 것이다. 하루를 꼬박 그렇게 지냈다.

그날은 우리 아들 캠프가 있는 날이다. 청소년 캠프로 밴쿠버 순복음 교회에서 열렸다. 캠프 장소까지 아들을 라이드 하기 위해 우리 딸과 함께 순복음 교회로 향했다 아들을 내려 놓고 오는 길에 갑자기 내 머리를 탁 치는 강한 성령의 깨달음이 있었다.

내 몸을 누가 만드셨는가? 만드신 분께서 내 몸의 상태를 가장 잘 아실 거야 그분에게 맡기며 기도 해야 하는데 걱정 속에서 병마에게 하루를 꼬박 끌려 다녔다는 생각을 하니 억울 한 생각이 들었다. 난 집에 오는 차 속에서 선포 하기 시작 했다.

“날 꼼작 못 하게 하는 병마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 갈 찌어다.

네가 내 목뼈 8개를 다 부려 뜨려도 난 너에게 굴복 하지 않는다 이 더러운 병마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 갈 지어다.! 선포 하며 외치기 시작 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재여 담대 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심판 날과 멸망에 날 내가 섰는 눈 앞에 곧 다가 오리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 하리라” 목청을 다 하여 기도 하며 찬송을 불렀다.

차안에서 큰 소리로 병마를 대적 하며 찬송을 부르니 옆에 앉아 있던 딸 아이가 토끼 눈을 하며 놀란 표정으로 “엄마 왜 그래? 엄마 괜찮아?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응 엄마 괜찮아 목 디스크 병마가 엄마를 꼼작 못하게 붙들고 있어서 예수님 이름으로 쫓아 내는 거야 너도 엄마를 위해서 기도해줘” 하며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운전 하고 집에 오면서 부흥회를 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일어 났다. 가눌 수 없던 목이 가벼워 졌다. 이리 저리 목을 움직여도 전혀 아프지 않다. 팔을 올려 보아도 너무 가볍다. 머리도 개운 하다.

기적이 일어 났다.

“내 이름을 경외 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 하는 광선을 바라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 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 하였더니 병마는 떠나 간 것이다.

가끔은 전지 전능 하신 하나님을 의지 하기 보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꼼짝 못 하고 절절 메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의사는 우리의 약함을 의술로 도와 줄 뿐이지 근본 치료 자는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경험 하게 하셨다.

뒤돌아 보면 강권 하여 역사 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를 캐나다로 보내셔서 경제적인 압박, 사고로 인한 육체의 고통, 영적 침체로 고통의 벼랑 끝에 세우시고 강한 훈련 속에서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 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때는 몰랐다.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를….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하심이었음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비행기를 탈 때 마다 느끼는 놀라운 은혜가 있다. 내 앞의 시야를 가로 막았던 웅장한 건물들과 높게만 느껴졌던 산들이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 가면 갈수록 아주 작아지는 모습을 보며 신비 한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 창공에서 내려다 보는 밴쿠버 땅은 내 시야에 들어와 한눈에 볼 수 가 있다. 빅토리아섬 노스 밴쿠버 버나비 화이트락 리치몬드 등등,…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는 상상 할 수도 감히 보려고 생각 할 수도 없는 지역 들을 높이 올라 가면 갈수록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신다. 그러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다.

고통 속에서 내 생각대로 내 경험대로 내 지식대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칠 때는 모든 것이 문제 투 성으로 막막 하기만 했었는데 “주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내 삶의 전부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이 인도 해 주세요” 라고 모든 것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 하며 은혜 속으로 들어 갔더니 주님은 신비한 날개를 달아 주셨다. 주님께서 주신 날개를 달고 보니 내 삶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요 오히려 감사의 조건임을 훤히 보게 하셨다.

고통 학교의 훈련을 통과 하게 하신 후 이제는 이곳 저곳 다니며 주신 은혜 함께 나누라고 간증 하게 하신다. 가는 곳마다 내가 당한 고통을 통하여 또 고통 당 하는 자들의 위로 자가 되게 하시니 이 은혜가 어찌나 감사 한지…

나의 고통을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회복 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 할 수 밖에 없다. “내 고통이 가장 큰 줄 알았는데 전도사님 간증을 듣고 보니 내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어요” 라며 활짝 웃음 짖는 두통 때문에 고통 당한 여 집사님! “기도 해 주세요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이제부터는 주님이 나를 조건 없이 사랑 하셨던 것처럼 나 또한 남편을 사랑 할 수 있는 마음 주시라고 작정 기도 할 게여요” 하며 눈물 짖는 가련한 집사님! 집 나간 자녀 때문에 힘 들어진 사업 때문에 소망을 잃었는데 나를 낮추고 시험 하신 후 마침내 복이 되게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기쁨을 가지게 된 집사님! 육체의 고통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죽기를 소원 했는데 치료의 하나님을 고백 하며 살 소망을 갖게 된 집사님!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힘든 자들이 말씀으로 위로 받고 새 힘을 얻는 모습 들을 보며 성령님의 도우심에 감사 하여 또 눈물 짖는다.

남을 위로 한다는 것은 내가 당한 만큼 위로 할 수가 있다. 한 개의 고통을당한 자 가 두 개의 고통 당한 자를 위로 할 수 없다. 열 개의 고통 당 한자 만이 아홉 개의 고통 당 한자를 위로 할 수 있다. 두 번 다시 경험 하고 싶지 않는 나의 고통 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과 하게 하신 후 또 많은 영혼들을 살려 내게 하시니 어떠한 고통 이라도 감사로 받아 드릴 수 밖에….

기도원 사역을 하다 보면 고통의 벼랑 끝에 서서 내 힘으로는 감당 할 수 없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기도원으로 올라 온다.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알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 하다 보면 그들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그들의 기도 응답이 나의 기도 응답임을 경험 하게 하신다.

누구를 위로 하고 살려 내고 무엇을 하라고 이 사역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은혜 주시려고 이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며 은혜 속에서 간증 하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은혜 속에서 기도원 사역을 감당 한지도 6년의 세월이 흘렸다. 7000평의 땅을 허락 하시고 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돌아 오게 하시는 기도의 도피성이 되게 하시어 가장 행복한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오늘도 두 무릎 드리며 눈물로 감사 기도 드린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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